"향불의 울림" (이길우작가) 김진엽(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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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미술전(세계일보) 창간33주년 기념(이길우작가)
2022년2월16일3시 개막식(선화랑)
"향불의 울림"
김진엽(미술평론가)
1. 생성과 소멸
예술은 대상을 모방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방은 단순히 형태 모사가 아니라 삶의 원형을 모방하는 것이다. 미술의 이미지는 개인이 창작한 것이지만 사회의 보편적인 인정을 통해 작품으로 규정되며, 뛰어난 작품은 현시대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그렇지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보편성을 파악하기란 힘든 문제이고, 특히 예술의 전통적인 매체로서 그러한 문제의식에 접근하기는 더욱 힘든 형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과 매체의 융합이다.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에서 보면 이길우의 ‘향불’ 작업은 실험적이며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드는 시도로 파악된다. ‘향불’은 기존의 한국화의 ‘채움과 비움’의 과정을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의 변환하고, 이를 통해 현대인의 삶을 표현한다. 향불로 태워진 구멍을 매개로 다양한 이미지들이 중첩되면서, 우연과 예측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이길우의 작업이다.
“…순지에 향불의 끝부분을 접촉시켜 불구멍을 내는 과정은 새로운 기법의 발견이면서도 태우고 변화되는 과정이 불교의 윤회사상처럼 마음에 와닿았다. 일상의 이미지가 표현된 작품 위에 향으로 구멍을 내는 과정은 일상의 파괴이며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는 과정이다.”
이러한 향불을 통해 만들어진 구멍에는 작가의 개인사와 우리 사회의 굴곡이 함께 공존한다. 더 세부적으로는 유한한 인생에서 삶의 무상함, 현실과 예술 사이의 긴장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향불의 구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길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향불’에 대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불교의 ‘윤회사상’을 언급한다.
현생의 업은 끊임없는 윤회를 만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탈의 길에 이르는 것이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부처에게 바치는 것인데, 불교계에서는 소신공양을 자살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망가짐을 무서워하지 않는 구도(求道)의 정신으로 해석한다. 이길우의 ‘향불’도 현재를 태우면서 모든 것을 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윤회의 굴곡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결단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향불’은 단순히 삶에 대한 무미건조한 시선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따스한 시선이다. 무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애환과 고통을 이길우는 향불의 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길우의 ‘향불’은 실험적인 조형 어법이면서도 자기 소멸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숙과 이해의 과정인 것이다.
“…순지에 향불의 끝부분을 접촉시켜 불구멍을 내는 과정은 새로운 기법의 발견이면서도 태우고 변화되는 과정이 불교의 윤회사상처럼 마음에 와닿았다. 일상의 이미지가 표현된 작품 위에 향으로 구멍을 내는 과정은 일상의 파괴이며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는 과정이다.”
이러한 향불을 통해 만들어진 구멍에는 작가의 개인사와 우리 사회의 굴곡이 함께 공존한다. 더 세부적으로는 유한한 인생에서 삶의 무상함, 현실과 예술 사이의 긴장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향불의 구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길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향불’에 대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불교의 ‘윤회사상’을 언급한다.
현생의 업은 끊임없는 윤회를 만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탈의 길에 이르는 것이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부처에게 바치는 것인데, 불교계에서는 소신공양을 자살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망가짐을 무서워하지 않는 구도(求道)의 정신으로 해석한다. 이길우의 ‘향불’도 현재를 태우면서 모든 것을 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윤회의 굴곡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결단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향불’은 단순히 삶에 대한 무미건조한 시선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따스한 시선이다. 무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애환과 고통을 이길우는 향불의 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길우의 ‘향불’은 실험적인 조형 어법이면서도 자기 소멸의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숙과 이해의 과정인 것이다.
한국화로 시작한 이길우의 작업은 주변의 인물들이나 사물들, 일상의 풍경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유명 인사들, 또 최근에는 신문이나 사진 등 대중매체를 이용한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한국화와는 차별성을 두는 것으로, 현대미술의 실험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시각 매체를 융합시키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화염이나 배접 기법 외에도, 대중적인 영화의 오버랩이나 투과 등의 기법도 함께 사용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길우의 작업이 실험적이지만 소재들은 자연과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친근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작가 자신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 현대미술의 문제점인 대중과의 단절 대신 자신의 작업은 적극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길우의 작업에서 실험적인 방식과 친근한 소재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점으로 이어지는 ‘향불’의 사용으로 조화를 이룬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개념을 가진 ‘향불’은 이미지들을 ‘레이어’(layer)로 만드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향불을 통해 만들어진 작은 구멍은 소멸을 상징하지만 대신 새로운 이미지의 생성도 의미한다.
‘향불’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이미지는 소멸의 과정이지만, 이러한 소멸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계속되는 중첩의 과정을 통해 일부의 이미지들이 여전히 남게 되고, 최종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이 실루엣처럼 연결된다.
이러한 레이어를 통한 이미지의 중첩은 <오고 가는 길(2021)>에서 잘 드러난다. 길 위에 서 있는 인물은 현재의 시간이 아니라 마치 다양한 시간의 차원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공간이지만 다양한 시간들이 혼재함으로써 인물은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현전’(presentation)의 대상이 된다. 즉 인물과 거리의 풍경은 묘사된 대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처럼 각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재(the real) 화가 가능한 것은 향불을 통한 ‘생성과 소멸’이라는 이길우의 실험적인 방법 때문이다. 대상의 존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하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화면의 인물이나 풍경들을 우리의 기억 남게 만드는 것이다.
향불이 흔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이러한 시간의 혼재는 최종적으로 우리 삶을 조망하게 만든다. 그래서 향불의 춤은 윤회라는 인연의 공허함도, 생성과 소멸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존재 의미도 망각하게 하는 침묵의 언어가 된다. 침묵의 언어는 의식과 무의식, 투명과 불투명,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언어이다.
우리 삶에 구멍을 내는 향불은 현재를 태우지만, 잊힌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며 또 그것을 넘어서 더 깊은 근원으로 우리들을 인도한다. 그곳에서는 성장의 욕구와 소멸의 욕구 사이에 나타나는 팽팽한 긴장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서정성에 기반한 새로운 삶의 의미가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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